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 프로이트가 그랬다죠. 정상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을 잊고 그 대상에 투사한 리비도를 거두어들여 다른 대상에 전이함으로써 애도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일정시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고 감정적 애착이 단절되지 않는 애도는 실패한 애도(우울증)라고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프로이트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언제나 더 와닿습니다.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는, 애도는 실패해야(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요. 프로이트의 애도가 고인의 타자성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애도'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고인의 타자성을 내 안에 기억으로 보존하는 '기억의 애도'일 텐데요. 몇 번의 죽음들을 겪으면서, 저는 데리다의 저 말은 '이해한다'의 영역이 아니라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슬픔은,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박혀 있는 것이니까요, 가시처럼.
물론 데리다는 애도의 개념을 '원초적 애도'로 까지 밀고 나가서, 애도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 "인간의 삶에 영속적으로 내재하는 본질적인 조건"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면서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까지 선언합니다. 이 말을 제 식대로 속되고 쉬운 말로 바꿔보면 '애도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냐? 애도할 줄 모르는 게 사람이야?'일 텐데, 이 말 역시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인 것 같아요. (부디 정부가 인간이기를.)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열어젖혀지는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한, 귀담아 듣고, 똑똑히 기억하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목소리와 행동을 보태는 애도를 다짐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애도를, "더더욱 진짜 애도를"요.
🔖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편지 저편 '혼비씨'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 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었다가 졌다.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서 잔잔하게 살아가듯 그 모두를 품고도 되도록 명랑한 소식을 전하려 애썼지만 실패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덜 검열하고 덜 재촉했던 건 모니터 저편에서 기다릴 수신인의 존재 덕분이었다. 무엇을 써 보내더라도 사려 깊게 읽어 줄 혼비씨가 있어서였다. 편지 쓰는 사람은,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을 떠올리면 더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다만 이 사람의 안부와 안녕을 묻는 일이야말로 편지의 처음이자 끝이고 전부라는 것을.